2024-02-04
이여운
2019. 이여운의 건축물 그리기에 대한 단상들/ 이인범 (상명대 조형예술학과 교수)
2019년 작 <노동당사>와 <농산물검사소>
최근 화가 이여운의 건축물 그리기 작업은 38선 이북 철원지역에 위치한 북한 <노동당사>(2019), <농산물검사소>(2019)였다. 공동 프로젝트 <신기루–경계공간을 바라보는 다중의 시선 mirage_multiple gages on liminal space> 즉, “이데올로기적 경계선들의 타당성에 질문을 던지며 문화 예술이 집행되고 보여지는 정치사회적 경계적 메커니즘을 해체 재구성”하고자 하는 취지로 두 동료 작가들과 함께한 프로젝트의 산물이다. 이 작업들은 ‘한국전쟁의 상징이자 분단의 기호’인 DMZ를 소재로 ‘충돌과 단절을 넘어 소통과 공유, 협력과 공존의 가능성’을 묻고 있다.
일제강점기 말에 건축된 <노동당사>나 <농산물검사소> 건물은 해방 후 한 동안은 김일성 치하에서 노동당사 같은 권력을 작동시키는 공적인 장소로 사용되었다. 한국전쟁 후 우리 쪽 관할이 된 후 복원되어 보존되고 있는 근대기 건물들이다. 두 작품은 이들의 진실에 다가가고 자 하는데, 그 결과물은 마치 지질학자나 고고학자들이 깊은 지층을 탐사하고 사물들 접근하듯이 건물에 각인된 그동안의 인간의 삶과 세월의 층위들을 투시하여 중첩시키고 있다. <농산물검사소>의 경우, 최근 복원된 모습, 복원 전의 전쟁시 폭격으로 숭숭 구멍 나 얼룩진 모습, 그리고 이제 출입이 자유롭지 않아 인적이 끊긴 채 자연의 복원력으로 풀들로 뒤덮힌 광경 등 시간의 전개에 따라 변해 온 건물 모습들을 동일 화면에 단층 촬영 필름같이 오버 랩 시키고 있다. 건물을 그리되 시간의 단층들에 파고 들고 있다는 점에서 <노동당사> 역시 다르지 않다.
애초에 벽이나 공간들로 틀 지워진 건물의 미학적 조건들, 포탄이 관통한 자국들 그리고 시간의 흐름 속에 소멸될 수밖에 없는 물리적 사태들로서 건물에 다가서는 작가의 시도에서 풍경화들에서 흔히 접하게 마련인 정서적 태도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얼핏 보기에 그 겉모습은 실용적으로 쓰이거나 고증하기 위한 조감도 같다. 그런데 우선은 마치 18세기 중엽 달랑베르, 디드로의 『엔사이클로피디아』에 게재된 도구나 연장 같은 인위적 사물들 그림 도판 들이 그렇듯이 공간적인 전후 맥락을 소거시켜 순전히 건축물에만 집중케 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그런데 건물의 물리적 변주를 각기 다른 시간적 역사적 레이어들로 중첩시켜, 급기야 한반도에서 전개된 여러 사건들 즉, 식민피지배, 해방, 이데올로기 분열과 남북 분단, 6‧25 한국전쟁, 통치 권력의 격동 같은 민족 공동체가 근대기를 거치며 겪었던 다양한 문화적 기억들을 한 자리로 불러낸다.
그 자체로 건축물을 그리는 일
이러한 시도가 작가에게 하루아침에 일어난 게 아님은 말할 것도 없다. 알다시피 이여운 작가의 관심은 지난 2000년대 초부터 줄곧 건축물이나 도시 경관 그리기에 쏠려있었다. 태어나 몸담아 살아 온 서울. 뿐만이 아니라 토쿄, 뉴욕 같은 동시대의 지구촌 메트로폴리스 풍경들. 아시아, 유럽의 오랜 궁전이나 사찰, 성당, 교회 같은 종교적 상징물들. 시청이나 역사(驛舍), 기념비적인 문, 중앙은행 같은 공공 건축물들, 가옥이나 거리… 이여운의 예술적 이슈는 인간들이 이룩해 온 다양한 건축적 행동들을 향했었다.
이들 건축물이나 도시 풍경이란 인간들이 이 땅에 살아가고자 건립해내지 않으면 안 되는 인공물들이다. 철학자 하이데거의 말대로라면, 죽을 자들로 살아가도록 운명 지워진 인간들이라면 집을 짓는 일은 더더군다나 이 대지에 시적으로 거주하기 위해서는 건립하지 않으면 안될 그 무엇이다. 그러한 건축물들을 향하여 한 화가가 일관된 입장을 견지하는 일은, 따라서 인간이 이룩한 문명 자체에 대해 묵상적 태도를 갖는 일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작가의 시선을 그토록 오래 낚아채는 힘은 어떤 것이었을까? 끊임없이 중첩된 필획의 먹 선들로 이루어진 화면은 인고의 과정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엔 감미로운 색채도 빛도 거세되어 정서적인 등가물 같은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의 건축물 그리기는 단호하게 마저 보일 정도로 극도로 절제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그것들 모두가 일체의 변주가 억제된, 정제된 직선들로만 된 조형성과 구조의 탐구라는 동일한 목적을 향해 도열되어 있다”고 하는 평론가 심상용의 언급은 적절해 보인다. 그래서 그 건축으로 규정된 장소와 공간에서 벌어졌을 이 나라의 근대사의 사건들에 대한 묵상으로 다가서기도 하고, 이 땅을 살아가는 인간 존재들이 꿈꾸고자 했던 것들을 향한 엄정하고 냉철한 자기 검토 작업 같기도 하다.
처음부터 줄곧 그렇게 한결같았던 것은 아니다. 애초엔 다만 자신의 소외와 고독이지, 자신을 그렇게 내몬 삶의 조건으로서의 도시나 집 자체가 관심사였던 것 같지는 않다. 도시 건물들 이미지가 화면을 가득 채우기 일쑤이다. 그런데 <고독이 당신을 덮칠 때>(2002) 연작들이나 <자학하다>(2003),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2003) 같은 작품들에서 그것들은 단지 무의식적 허상을 지시하는 작가 자신의 그림자를 위한 배경 정도로 채택된다. 그래서 도시적 삶을 살아가는 자신의 처지를 다룬 자화상 정도로 읽힌다.
그런데 다른 한편에서 몸담아 사는 집과 공간 그 자체를 탐구하는 일이 진행되고 있다. <바라본다는 것-먼 풍경, 가까운 풍경>(2002), 그에 앞서 이미 <마음의 시선>(2001)에서부터 <Illusion>(2005)을 거치며 작가의 발걸음은 삶을 담는 그릇인 집들을 향해 옮겨지고 있다. 그리고 <소극적 공존>(2007), <그 속에 갇히다>(2007) 연작 그리고 <지하 밀실이 있는 방>(2008), <금암로터리>(2011)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 거스를 수 없는 작가의 예술적 이슈로 자리 잡는다. 이러한 화두에 다가서는 태도는 매우 적극적이면서도 구조적이다. 그래서 이여운의 건축물 그리기는 매우 방법적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자신을 포함한 인간 존재에 대한 피하기 힘든 철학적 물음을 그는 호모 파버(homo faber)로서 인간들이 집요하게 삶을 확립하기 위해 구축해 온 건축물들이나 도시 경관들 같은 인공적 세계를 향한 질문으로 대체시키고 있다.
화가로서 건축물들에 대하여 그 자체로 질문하는 일. 그 일은 인간의 구조와 동일시를 통해 건축을 논했던 비트루비우스나 ‘짓는 일(res aedificatoria)’을 근대적으로 일궈낸 알베르티의 건축론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우리가 삶의 존엄성을 정의하고자 하는 온갖 인위적 시도(ars)의 정점에 위치하는 것이 다름 아닌 집을 그리는 일 아닌가? 하지만 작가는 집 그리기로 거꾸로 우리의 삶을 조건지우는 이 세상의 건축물들에 예민한 감수성을 발동시켜 가고 있다. 그 긴 여정에서 동시대 건축물에서 떠나 옛 <명륜당>(2011)을 그리며 하나의 전환점을 맞고 있다. 온갖 자연적 혹은 역사적 시련을 견뎌 낸 옛 건축물들을 그리는 일이란 그 깊이에서 근본적으로 차원이 다른 일이다. <가회동 11번지>(2012), <서울역>(2014), <월정사 수광전>(2014), <기념비-경복궁>(2017), <기념비-서울시청>(2018) 그리고 베니스 살롱 오픈 스튜디오 작업으로 ‘베니스의 돌집들’까지 이어지는 옛 건축물들 그리기 작업들이 그의 작업에 고고학적 깊이를 갖게 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인간들의 삶의 구조를 시간을 거슬러 그 핵심으로 들어가 실천해 내는 작업에 다름 아니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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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그리기, 그 너머
건축물 그리기라는 종래의 작업들을 조망해 보면, <<신기루>> 프로젝트에 의한 <노동당사>와 <농산물검사소> 같은 작업들이 조금 더 명확하게 들어온다. 그런데 몇 가지 점에서 새로운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것들은 종래의 작업들에서 잠복되거나 혹은 유보되었을지도 모르는 작가의 예술의욕이 어떤 것들이었을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게 될지 슬며시 암시해주는 것 같아서다.
무엇보다도 작가의 시선이 물리적 조건이나 조형언어로서 만이 아니라 인간사가 펼쳐지는 장소로서 삶 자체이자 문화적 기억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자신의 존재를 향했던 청년기의 물음들로 귀환하여 인간이란 누구인가를 묻는 일 아닌가? 문학적 서사를 극도로 배제한 채 삶을 냉철하고 엄정한 조형언어로 환원시키는 작업들은 이제 삶 자체를 탐색하는 방법으로 심화되고 있다. 단순한 이미지 재현이 아니라 구도적 엄정하고 냉철한 구도적 수행으로 이어지던 건축물 그리기가 비로소 삶의 체온을 지니게 되는 듯하다.
이번 작업들이 보여주는 또 하나의 시사점은 일찍이 지필묵에 토대를 둔 수묵 산수화에서 예술적 이념을 가다듬고 기법을 닦으며 시작된 작가로서의 출발점과 관련된다. 예술적 타자나 다를 바 없는 건축물 그리기라는 먼 우회로를 거쳐 이제 작가가 다시 동시대적 언어로서의 한국화의 가능성을 열 여지 말이다. 의도했든 아니든 작품에서 실천되고 있는 성취들은 수묵화의 계보적 맥락에서 주목할 만하다. 뭇 건축물들에서 삶의 본원적 형태를 탐색하는 거듭된 지적이고 드로잉적인 필획들은 서구로부터 받아들인 캔버스를 기반으로 새롭게 경계를 넓히는 가운데 허공을 무수히 가르며 자신의 검법을 찾아가는 검사들의 행동을 환기시킨다. 한편, 인위적 세계와 대칭되는 한계 내에서이지만 작가의 시선이 다시 무위의 자연을 향하고 있다는 점도 눈에 띈다. 그 징후는 이미 고 건축물들과 나무 등 자연이 뒤얽혀진 생태적 진실에 마주하여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사원 등을 그린 몇 년 전의 개인전 <<정글몽>>전(2016. 9. 2~9.23, 갤러리 다온)에서 발견된다. “밀림 속에서 외지인에게 처음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고 하는 앙코르와트 또한 신과 인간의 경계, 동물과 식물의 경계를 넘나드는 신비로운 건축물이다. … 그 모든 것을 떠받치고 있는 자연의 위대함에 전율을 느끼게 된다.”(작가 에세이, 전시 카탈로그에서) 자신의 예술적 기원이 다름없는 수묵 산수화야말로 그 인위성의 경계 너머를 꿈꾸던 흔치 않은 방법에 다름 아니었을진대, 그렇다면 이제 다시 자연을 향해 던지는 작가의 물음은 어디를 향하게 될까? 우리의 삶의 장소가 하나부터 열까지 철두철미하게 인공화 되어 가는 이 시대에 건축물들이나 도시 공간을 그린다는 일, 그리고 산수를 향해 시선을 던진다는 일은 무엇이 같고 어떤 점에서 다른 일일까?
Fragmented Thought about Drawing a Structure
Lee, In-bum Ph.D critic & professor
Labor Party Building and Agricultural Quarantine Station
Recent works of the artist Yuwoon Lee are drawings of Labor Party Building(2019) and Agricultural
Quarantine Station(2019) located in Cheol-won beyond the 38th Parallel,
a place used to be part of the North Korean territory. A joint project, Mirage_Multiple Gages on Liminal
Space, is the ramifications of two artists, who raise issues about the validity of ideological boundaries,
dismantle and reconstitute political-societal and economical mechanisms
that arts and culture are executed and projected. This work suggests the possibilities of
communication-sharing and cooperation-coexistence beyond clash-disconnection through a subject,
DMZ, a symbolic word of the Korean War and the division of the Korean peninsula.
Labor Party Building and Agricultural Quarantine Station built in the late Japanese occupation period
became public spaces symbolizing power under the communist North Korea. After the Korean Conflict,
those buildings belonged to South Korea and reconstructed and preserved as modern historical buildings.
The two works seem to approach to the truth, and the outcomes project and superimpose human lives
with the layers of years inscribed on the buildings just as a geologist or an archeologist explores deep
layers of earth and approaches to objects. Two artists create art works as overlapping several images of
the Quarantine Station, the images recently reconstructed, of a shaky structure as the remains of the
war and of a abandoned structure covered with vegetation after being a no-man’s land.
The art work on Labor Party Building is not different from the art work of the station in terms of digging
down the layers of time while drawing a building. In case of the Agricultural Quarantine Station, the artist
juxtaposes the changes of the building through time with the images of a recently renovated structure,
of decayed building with lots of ballet wounds and of a building covered with vegetation after no one
visited on the same canvas like a tomography. In terms of Labor party Building, her drawing practices the
same idea, drawing the building, yet digging in the layers. The artists’ emotional attitude usually
identified in a landscape painting cannot be found when they deal the buildings with the aesthetic
conditions initially framed by walls and spaces, cannon ballet wounds and temporal states vanished
throughout time. The appearance of the works looks like a blueprint usually used for practical purposes
or historical researches. As the artists get rid of spatial contexts around the buildings, their art works
become impressive just like the illustrations of man-made objects such as tools
and equipments showed an encyclopedia by Talembert and Diderot in the 18th century. As the artists
overlap the physical variations of the buildings with the individual layer of a different time and history,
they call up various cultural memories at once, the memories of many incidents, Japanese occupation,
emancipation, ideological disputes, division between North and South Korea, the Korean War and the
turbulence of power that Koreans have experienced in the modern era.
Works to draw the buildings as it appears.
The artist do not suddenly come up with this kind of drawings. As known, the artist Yuwoon Lee has paid
attention to buildings and city landscapes since the year of 2000. The artist’s artistic issues embrace
diverse architectural activities that human beings have accomplished, the activities including
contemporary metropolis landscapes of her hometown Seoul, Tokyo, New York, old palaces, religious
icons such as temples, cathedrals and churches in Asia and Europe, public buildings such as city halls,
train stations, monumental gates, central banks, or houses and streets.
Those buildings and city landscapes are man-made structures that human beings
should construct to live. According to Heidegger, building a house is something that human beings, whos
e lives are destined to death, should construct for temporal dwellings in this land. An artist’s consistent
attitude towards these buildings is not different from contemplating civilizations that human beings have
achieved. Then, what makes the artist devote to the buildings? A canvas filled with consistently
overlapped ink strokes shows the process of her endurance. Nevertheless, sweet colors and light are
castrated and one cannot find any emotional equivalents there. Her drawings show themselves
extremely controlled as they appear to be adamant. At this point, a critic Sang-yong Shim’s
assertion seems to be adequate, the assertion that “it is all lined up to serve sole purpose to search for
the formativeness and exploration of structures strained any variation and controlled lines.” This
encourages her audiences to consider incidents taken place in the places and spaces in the Korean
modern history and seems to be a strict and sober self-assessment about things that
human beings have dreamed of. Her works of art were not persistent from the beginning. Initially, she
mainly dealt with her alienation and loneliness. She did not seem to pay attention to a city or a house as
living conditions that drove her into the situation. So, Her canvases were full of buildings in a city. But
the buildings were taken as a background for her own shadow to simply point out unconscious illusions
in her works, When Loneliness Sweeps You(2002), Self Torment(2003) and From What Point Do I Get
Wrong(2003). Thus, they were regarded as herself portraits dealing with herself living in a urban life.
On the other hand, she carried on her work to explore her own house and space. Through her works,
from the Sight of a Mind(2001) to Illusion(2005), she changed her focuses on dwellings as a bowl to
hold life. The artist’s artistic issues were firmed through the procedures of her works, Passive Co-existence(2007)
and a series of Incarcerated in It(2007), A Room with a Secret Chamber Underneath(2008) and Geum
Am Rotary(2011). Her approach to the topic was very active and systematical. So, her drawings of
buildings seem to be very methodical. Inevitable philosophical inquiries about human existence were
replaced by questions about a man-made world, such as buildings and city landscapes,
that human beings had persistently constructed in
order to establish their lives.
Without mentioning Bithurubinius’ notion of architecture, the notion that identifies architecture with a
human body, or Alberti’s architectural theory modernizing res aedificatoria, drawing a house is nothing
other than a thing on a peak of all ars to verify nobility in life, is not it? The artist reversibly becomes
sensitive to buildings that load conditions on human life when she draws dwellings. When she draws a
former Myeongryun-dang(2011), which is far different from her contemporary buildings,
during her long career, she encounters a turning point. Drawing old buildings survived through natural
and historical ordeals is profoundly different in depth. It is no doubt that her drawings of old buildings,
such as Ga-heo-dong 11(2012), Seoul Station(2014), Wol-jeong-sa Su-gwang-jeon(2014),
Monument-Gyeongg Bok Palace(2017), Monument-Seoul Metropolitan City Hall(2018) and
Stone Houses in Venice(a work for the Open Studio of Venice Salon), intensify archeological depth in her
works. She retraces the patterns of human lives, touches the cores of them and displays them through
her works.
Drawing a house and beyond it
As thinking about previous works called “drawing a building,” the artist message conveyed in her art
works, Labor Party Building, Agricultural Quarantine Station and Part of Mirage project, become much
clear. But, there are somethings new in certain points. They seem to slightly insinuate what the desires
of the artist can be, the desires submerged or procrastinated in the previous works, and where they are
originated from and will be destined. Above all, the artist sees the building as not only physical
conditions and formative languages but life itself projecting a human history and cultural memories.
From this point of view, she returns to questions towards her existence in her adolescence and asks
who a human being is. As excessively removing literary descriptions, works converted a life into a
sober and strict formative language become intensified as methods to explore the life itself. As she
performs not the reenactment of images but compositive asceticism in creating her works, her
performance, drawing a building, becomes alive. One more implication from her works is that her initial intention
in being an artist is heavily related to her training of ink landscape painting. At the training, she pulls
her artistic ideologies into shape and learns artistic techniques. Through an unpopular genre, drawing
buildings, the artist slightly opens a possibility for the Korean painting to survive in the contemporary
art realm. Whether it is intentional or not, her achievements practiced on her works should be
recognized within the Korean ink painting genealogy. Her works remind one of the behaviors of a knight,
who is desperately looking for his own art of sword as searching for the origin of life and expanding the
realm of her painting on the base of the Occidental drawing. On the contrary, within limits contrasting to
a man-made world, it is interesting to see the artist’s perspectives focusing on an inactive nature.
She revealed the signs of her intention in her previous solo exhibition, Dream in a Jungle(2016. 9.2~9.23, Gallery Daon).
In this exhibition, she faced ecological truths reflecting nature tangled with old buildings and trees and
drew Angkor Wat. As she stated “Angkor Wat reveals itself to a stranger in the jungle. Ankor Wat is a
mysterious building that crosses over the boundary between a deity and a human, between animals and
vegetation... I feel thrilled from the greatness of nature that upholds everything,” an ink landscape
painting has been positively an essential method to grow beyond artificiality. Then, where did her
inquiry towards nature lead? In the era when human’s dwellings were artificially and entirely made,
what things were different and same between drawing buildings and urban spaces and gazing at nature?